MY MENU

종이의 역사

파피루스부터 최신 정보통신 시대까지
종이는 식물성 섬유를 나무에서 분리시킨 다음, 다시 이것을 물속에서 짓이겨 발이나 망으로 떠서 건조시킨 얇은 섬유조직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그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쓰임새도 다채롭습니다. 종이를 갖지 못했던 선사 시대의 인류는 무덤이나 집터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후세에 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인간은 의사 전달을 위해 증표나 기호, 문자를 만들었고 이를 점토판, 대나무, 목편(木片), 석판, 짐승가죽 등에 표시하여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방마탄지



중국 감숙성에서 출토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이자 지도이다.
바로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편리하게 기록하고 남길 수 있는 재료를 탐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종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아즈텍인들은 종이 속에 심오한 세계가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이는 신들을 달래는 의식(儀式)의 수단인 동시에, 통치자의 언행을 전파하고 기록하는 물질이였다. 중국인들도 종이를 악을 쫓는 부적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종이를 태운 재를 허공에 날림으로써 사람의 영혼이 천상(天上)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두루마리 형태의 경전



나라 실치난타가 번역한 주본의 고려시대 목판본 80권중 제 36권 십지품에 해당하는 두루마리 형태의 경전, 국보 제 277호 한솔종이 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에서도 종이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였다. 기록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창호지, 장판지 등으로 일상 생활에 널리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시신을 종이에 묶어 염을 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소지(燒紙)를 함으로써 죽은 자의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이렇듯 종이는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을 거듭해 왔다. 즉 종이는 우리의 정신적 토양을 담는 그릇이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온 것이다.

종이의 기원과 발명

- 인간이 맨 처음 사용했던 기록 재료 중의 하나는 무른 찰흙판에 송곳 같이 끝이 뾰족한 것으로 기호나 문자를 기록하고, 이를 말려 보관한 점토판이었다. 이러한 점토판 문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거대한 점토판 도서관이 남아 있을 정도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 종이와 유사한 재료로 가장 오래 된 것은 기원전 2500년경 이집트 나일강가에서 자라던 파피루스(Papyrus)였다. 그러나 페이퍼(Paper)의 어원이 된 파피루스는 식물성 섬유를 초지(抄紙)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종이라고 규정짓기는 곤란하다. 중국에서는 서기 105년 후한시대 화제(和帝)때 궁중의 물자 조달 책임자였던 채륜(菜倫)이 종이를 발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전까지는 대나무나 나무 조각을 끈으로 묶은 간(簡)과 독(牘)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근 전한 시대의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종이의 기원은 채륜의 발명보다 150~200년 정도 거슬로 올라가게 되었다. 당시의 종이는 마포(麻布), 마승(麻繩) 등 넝마를 원료로 하여 미숙한 초지 기술로 만들었다. 하지만 채륜은 필기가 용이하도록 개량함으로써 최초로 종이다운 종이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제지기술의 전래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 기술이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채륜이 제지술을 개량했던 서기 105년 경은 한나라가 한반도에 낙랑군을 비롯한 4군을 설치했던 시기였다.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세력이 정립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남만주 일대까지 확장되었다. 따라서 지역적, 문화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었음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는 3~4세기 경에 중국의 제지술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의 문헌에는 중국 오(吳)나라 장수인 준추가 낙랑의 변경을 습격하여 잡은 포로를 신문하는 기록 중에 백제가 제지술을 전수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삼국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던 시기였으므로 제지술과 불교의 전래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중국의 <조지사화(造紙史話)>에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384년)가 제지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중국 <송사(宋史)>는 신라에서 백무지, 우지, 학청지 같은 종이들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비록 제지술의 기원은 중국이었지만 이를 전세계로 전파시킨 것은 우리 민족이었다. 서기 610년 고구려 스님 담징은 일본에 처음 제지술을 전하였다. 그리고 서기 751~757년, 당나라 군사를 이끌던 고구려 출신의 장군 고선지는 이슬람군과 탈라스에서 전투를 벌이다 많은 부하들이 적의 포로로 잡혔다. 그 포로들은 사마르칸드로 잡혀가 그곳에서 제지기술을 전파하였다.

이후 사마르칸드의 제지 기술은 793년에 바그다드로, 960년에 이집트 카이로로, 1100년에 모로코로, 1151년에는 스페인으로, 1420~1470년에는 인도에까지 확산되었다. 이렇듯 중국의 제지 기술은 고선지 장군의 부하들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19세기를 기점으로 서양 문물이 수입되면서 중국 제지술은 더욱 정교한 기계와 새로운 원료의 형태로 변모되어 다시 동양으로 역수입 되었다. 일본에서는 1872년에 최초의 양지 제조 공장인 유우꼬오샤(有恒社)가 가동되었고, 이 기술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 세계적 제지사가(製紙史家)인 다드 헌터(Dard Hunter)에 의하며, 우리 민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료 염색에 의한 색지를 만들었으며, 또한 종이 봉투를 만들어 사용한 첫번째 민족으로 되어있다.

제지원료의 변천

- 중국 한(漢)나라 시대의 제지 원료는 나무껍질, 헌 어망, 헌 삼베(麻), 넝마 같은 것으로 시작되어 그후에는 주로 대(竹)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제지술이 발달함에 따라 볏짚, 단피(檀皮), 상피(桑皮), 마섬유(삼과 모시)등이 원료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마섬유와 닥나무껍질, 상피를 주로 사용하였다. 일본에서는 마섬유를 사용하다가 닥나무 껍질, 삼지 등으로 변천되었다.

- 동양 삼국에서는 질긴 인피(靭皮) 섬유를 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폐지를 재생하여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를 환지(還紙)라 한다. 또 한국에서는 조선조 초기에 원료난이 극심해지자 닥나무 껍질에 볏짚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으로 만든 종이를 고정지(藁精紙)라 하였다. 또한 제지에 필요한 증해 약품으로는 식물을 태워 우려낸 잿물을 사용하였고, 드물게는 석회수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서양에서는 헌 마(Hemp)나 아마(Linen), 면섬유를 넝마 형태로 수집하여 사용하였다.

- 초기(1750년대)에는 밀짚이나 야생 식물을 일부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일반화 되지는 못하였다. 1774년에는 미국에서 넝마 표백이 처음으로 실용화되었고, 1800년에는 짚을 원료로 한 소다펄프가 영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목재펄프가 등장하기까지 세계 모든 나라는 원료난에 시달렸다. 넝마는 각 가정에서 나오는 생활 쓰레기였기 때문에 이를 수집 공급하는 일에 제지업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따라서 인구 밀도가 낮은 미국은 1829년에 가압식 증해관을 이용하여 소다와 석회로 넝마를 펄프화한 것이 시초였다.

- 1940년 독일인 켈러가 쇄목 펄프를 발명하여 제지 산업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으나 시간당 생산량은 2kg에 불과 하였다. 1844년에는 염소 펄프법과 쇄목 그라인더가 발명되었고, 1853년에 가성 소다 증해에 의한 소다 펄프법이 개발되기 2년 뒤부터 미국에서 공업화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854년에는 밀짚을 원료로 한 흰종이 제조법이 성공함으로써, 비로서 품질 경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1950년 통나무 화학 쇄목 펄프가 개발되어 신문용지 생산에 활엽수가 이용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리파이너 쇄목 펄프, 열기계 펄프,화학 열기계 펄프 등 각종 펄프가 개발되었으며, 순정 화학 펄프인 아황산 펄프, 크라프트 펄프, 표백 아황산 펄프, 표백 크라프트 펄프 등의 개발과 더불어 제지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 그러나 앞으로는 더욱 첨단화된 비염소계 펄프화, 산소 펄프화, 생화학적 펄프화 등의 개발과 목재 성분 전체를 활용할 수 있는 솔보리시스법 등이 개발될 것으로 전망한다.